인생역전 드라마 숙대앞 호떡집 그 아저씨

인생역전 드라마 숙대앞 호떡집 그 아저씨

:+)곤(+: 5 13,279
1998년 겨울 서울 갈월동 숙명여대 앞. 호떡 노점 하나가 문을 열었다.

이 노점에서 파는 호떡은 다른 곳보다 절반은 더 크고 맛이 있었다.

노점 내부도 여느 호떡집과는 달랐다.

주 고객인 여대생이 좋아하도록 내부를 예쁘게 장식했다.

30대 중반인 남자 주인은 항상 밝은 표정으로 손님들을 대했다.

늘 깔끔한 정장에 넥타이를 맸다.

당시만 해도 이 사람이 몇 년 뒤 연간 1,85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프랜차이즈 체인의 사장이 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국내 처음이자 최대의 죽 전문 체인인 '본죽'을 경영하는 김철호(43)사장은

사업을 하다 망해 호구지책으로 시작했던 호떡 노점상에서

'경영의 노하우'를 배웠다고 말했다.

김 사장은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잘 나가는 수입업체 사장이었다.

86년 설립한 회사는 순식물성 세재 등 주방.

욕실용품이 잘 팔리면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하지만 외환위기로 소비가 크게 줄면서 벼랑에 몰렸다.

1년간 버텼지만 회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빚잔치를 하느라 집과 승용차 등 사재를 몽땅 내놓다보니 가족들은 처가와

친척집으로 나눠 보낼 수밖에 없었다.

끼니도 제대로 잇지 못하던 때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변의 반응은 공사장에 나가서 벽돌이라도 져 날라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좀 더 나은 방법이 있다면,

어렵더라도 그 쪽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작은 음식점이라도 차려보겠다며 요리학원을 찾아갔고

허드렛일을 하는 조건으로 공짜 수업을 듣게 됐다.

새벽부터 밤 9시,10시까지 꼬박 학원에 있어야 했던 그가 생계를 위해

시작한 일은 호떡장사.

숙대입구역 앞에서 귀가하는 학생들과 취객들을 상대로 호떡을 팔았다.

손수레 등을 사는 데 필요한 75만원은 친구가 대줬다.

비록 노점상이지만 나름대로 양복을 갖춰입고 ‘꿀떡개비’라는 브랜드를 붙여

장사를 했다.

정장차림을 고수한 이유는 자신을 스스로 존엄하게 대하기 위함이었다.

견디기 힘든 추위에서도 솜옷을 입지 않고 넥타이를 매고 정장차림으로

호떡을 팔았다. 결국 이런 고집은 ‘이색’이라는 눈길과 함께 좋은 반응을

얻어 다른 호떡장수와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


지하철 티켓 살 돈이 없어 역무원에게 통사정을 할 정도로 형편은 어려웠지만

이를 악물고 꿋꿋이 버텼다.


사업을 해본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달랐다.

부채로 냄새를 피워 지나가는 사람을 뒤돌아보게 했고,

장사가 잘 되는 것처럼 보이게 하려고 일부로 손님을 조금씩 기다리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손님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살다 보면 별일을 다 당한다. '노점도 내 사업'이라며 마음을 다잡자

저절로 손님들에게 친절하게 됐다고 한다.

종로의 유명한 호떡집을 무작정 찾아가 3일간 사정한 끝에 배운 호떡

노하우도 도움이 됐다.



10개월간 호떡 노점을 하던 그는 1999년 친구와 함께 창업요리학원과 음식점

창업 컨설팅 사업을 시작했다. 친구가 돈을 대고 김 사장이 아이디어를 냈다.

스스로 창업을 준비하면서 요리를 가르치는 곳은 많아도 창업 노하우를

알려주는 곳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새로운 시장에 도전했다고 한다.

이후 3년간 그는 2000여명을 교육하고 500여명의 창업을 도왔다.

2002년 9월 그는 서울 대학로 뒷골목 2층에 '본죽'이란 간판을 내건

죽집을 차렸다. 왜 하필이면 죽이었는가.

고정관념을 깼더니 죽이 보였다. 생각해 보라.

‘죽쒀서 개준다’는 부정적인 말도 있지만, 사람들은 ‘죽’ 하면 환자부터

떠올리지 않는가.그만큼 죽이 건강식이고 영양식이라는 얘기다.

때마침 웰빙시대, 좋은 재료를 사용한 맛있는 죽이라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거라는 판단이 섰다. 대기업이 음식점에까지 손을 뻗치고 있지만,

죽은 대규모 생산이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대기업에 맞설수 있는

아이템이기도 했다. 개업 첫날 손님은 예닐곱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죽이 다이어트와 건강에 좋은 대체 음식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전단지를 한 장씩 리본으로 묶어 인근 지하철역에 돌리고

좋은 재료를 써 푸짐한 죽을 내놓으니까 단골이 하나 둘씩 늘었다.

한 번 맛을 본 손님은 친구나 동료를 데리고 다시 찾아왔다.

3개월이 지나자 하루 100그릇이 팔렸고, 한 두 달이 더 지나자 1층 계단

입구부터 손님들이 줄을 섰다. 6개월여 뒤인 2003년 봄, 그는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사람들에게 가맹점을 내주기 시작했다.

프랜차이즈 사업에 나선 것이다.

본죽만의 특별한 성공비결이 있다면, 잊혀진 음식을 되살린 점,

젊은 여성의 입맛을 겨냥한 점, 죽 한그릇으로 배가 든든해지게 양을 충분히

한 점 등등 이유는 여러가지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비결은 역시 죽에 정성과 사랑, 건강을 담은 게 아닐까.

상표 이름을 본죽이라고 한 것도, 본(本)에 충실하자는 뜻이었다.


점포를 개설하기 전 인테리어 컨셉을 정하고,

브랜드 디자인과 ci작업에 고심한 것도 모두 프랜차이즈를 염두에 둔 것

이었다. 메뉴를 개발하며 죽 하나하나에 들어가는 재료를 전부 계량화한

것도 이 때문이다.


3년이 지난 지금 본죽은 전국에 680개 가맹점을 두고

한 달에 180만 그릇의 죽을 파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됐다.

미리 쑤어 놓은 죽은 절대 팔지 못하게 하고 전국 어디서나 똑같은 맛이

나도록 조리법을 통일하는 등 품질을 유지하도록 했다. 

Comments

★쑤바™★
본죽...새로운 메뉴 하나씩 개발될때마다..
맛보는 재미가 쏠쏠.ㅋㅋㅋ
(웅언니는 죽 자체를 싫어하지요. 개밥같다고..+_+;;;;) 
smc^.^~
곤님도 클래식교육을 전파하심이(전 한분 쓰게하고 있슴)emoticon_002 
우늬Guide
잘되려면 어느정도(?)에 대가를 치러야하는군~ 
안쏘니
미쿡에서는 호떡 싫어할라나? 
smc^.^~
제가 93년도에 숙대앞에 첫직장다녔들때  붕어빵아저씨가 있었는데...

그때 숙대생과 결혼해서 화제가 됐었네요emoticon_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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