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므이 첨부터 못보신 분들을 위하여... 므이 전편..

소설 므이 첨부터 못보신 분들을 위하여... 므이 전편..

찰리 맨슨 8 8,320
1896년 베트남 북부 도시 달랏(Dal Lat)
베트남 북부에서 뻗어 내려온 장대한 쯔엉선 산맥 위로 청명하고도 푸른 가을하늘이 걸렸다. 그 아래 해발 1475미터의 중부고원 끝자락에 베트남의 작은 도시 달랏이 있다. 1883년 아르망 조약으로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만든 프랑스는 이곳 달랏에 휴양지를 건설했다. 프랑스군 지휘 하에 달랏에는 아름다운 프랑스풍의 건물이 하루에도 여러 채씩 지어졌다. 아름다운 계곡과 숲 말고도 달랏의 매력은 베트남 다른 지역의 고운 다습한 기후와 달리 1년 내내 쾌적한 날씨가 지속된다는 점이다.
달랏의 실질적 책임자인 프랑스군 올리비에 중령은 프랑스풍으로 지어진 아름다운 저택 베란다에서 초조하게 므이의 소식을 기다렸다. 그는 오늘밤 배편으로 베트남을 떠나 프랑스로 귀국할 예정이었고 므이를 비롯한 베트남인 몇 명을 데려갈 작정이었다. 하지만 다른 베트남인들은 모두 모였는데 므이는 저녁때가 다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심지어는 오전에 그녀의 초상화를 그리라고 보낸 조선인 화원조차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는 참다못해 부관을 불러 므이의 집에 다녀오게 했다. 올리비에는 신비한 수줍음을 간직한 베트남 소녀 므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녀는 아내인 리비아도 하지 못한 그의 아이를 임신해주었다. 아직은 리비아에게 그녀의 존재를 숨기고 있지만 이번에 프랑스로 돌아간다면 정식으로 므이를 소개하고 그 존재를 인정받을 작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므이가, 그의 아이를 가진 므이가 배가 떠날 시간이 되도록 소식이 없는 것이다.
부관이 출발한지 한 시간쯤 지나서였다. 부관과 조선에서 데려온 화원이 멀리서 나란히 말을 타고 돌아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므이가 그들과 함께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올리비에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올리비에는 저택 마당까지 달려 내려가 그들을 맞았다. 숨을 몰아쉬며 말에서 뛰어내린 부관과 조선인 화원은 약속이나 한 듯 얼굴이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올리비에는 불길한 예감을 가까스로 억누르며 물었다.
“어떻게 됐나?”
올리비에의 다그침에 부관은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올리비에가 이번엔 조선인 화원을 돌아보았다. 지난해 조선에 갔을 때 왕실이 서양문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그려오라고 그에게 딸려 보낸 화원이었다.
“왜 그러나? 므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화원이 리비아가 없는지 주위를 살피자 올리비에가 초조한 듯 소리쳤다.
“걱정 말게, 리비아는 없으니까. 자, 무슨 일인지 어서 말해봐.”
화원이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므이가 살해당했습니다.”
순간 올리비에의 입에서 단발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그는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화원을 뚫어지게 노려보다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말이야?”
화원은 몸을 떨며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눈에서 광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은 올리비에가 화원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잖아!”
“저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초상화를 다 그리고 므이가 떠날 준비를 할 동안 근처 숲에 산책을 다녀왔는데... 그 집에서 불량배로 보이는 베트남 남자 서너 명이 황급히 달아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이상해서 얼른 들어가 봤더니...”
올리비에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어떤 놈들인지 얼굴은 봤어?”
“아니오. 멀어서 잘...”
올리비에가 미친 듯이 악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그가 소리쳤다.
“당장 므이 집으로 가봐야겠어.”
부관이 말했다.
“얼마 있으면 배가 떠나 자칫하면 늦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이대로 떠날 수는 없어. 므이는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어! 내 아이를 가지고 있었던 여자란 말이야!”
올리비에는 부관이 말릴 사이도 없이 말에 올라타고 순식간에 내달았다. 부관도 뒤늦게 올리비에의 뒤를 따라갔다. 두 사람이 빠르게 시야에서 사라지자 조선인 화원은 그제야 떨리는 손으로 등에 지고 있던 그림들을 꺼내 그 중 한 장을 펼쳤다. 급하게 그려 아직 채 물감도 마르지 않은 거친 그림이지만 생생한 현장감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자 새삼 얼마 전의 그 참혹한 광경이 떠올라 화원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므이 집에서 본 여자는 그야말로 질투의 화신이자 악의 화신이었다. 그 여자의 원한을 사면 앞날을 장담할 수 없었다. 비록 므이가 가엾고 불쌍하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는 모든 걸 잊어야만했다. 조선인 화원은 그 순간 모든 비밀을 혼자만의 가슴에 담고 돌아가리라 마음먹었다.
올리비에가 말을 타고 어둠속을 30여분쯤 달리자 야자수로 지붕을 덮은 베트남 전통가옥이 한 채 시야에 들어왔다. 마을에서도 외따로 떨어져있는 므이의 집이었다. 집 앞에 횃불을 든 일단의 베트남인들이 모여 있었다.
올리비에가 집 앞에 도착해 말에서 내리자 그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를 향했다. 묘한 건 그들의 눈길에 영문을 알 수 없는 두려움이 담겨있다는 점이었다. 올리비에는 이글거리는 무수한 횃불을 헤집고 집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집에 들어선 순간 역한 피비린내와 악취가 덮치듯 달려들었고 악취보다 더 끔찍한 살육의 현장이 곧이어 시야에 들어왔다. 사체는 팔을 벌리고 바닥에 쭉 뻗어있었다. 하지만 사체 어디에도 므이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체는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만약 머리 없는 가슴에 걸려있는 그가 준 목걸이와 집만 아니라면 므이가 아니라고, 절대로 그녀가 아니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강한 충동이 느껴졌다. 사체에서 흘러나온 피가 흥건하게 바닥에 고여 있었다. 그런데 그 피로 누군가 바닥에 글씨를 써놓았다. 글은 베트남어를 잘 모르는 올리비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고도 강렬했다.
‘영원히 저주받을 것이다!’
대체 누가 왜 저런 끔찍한 짓을 저질렀을까. 하지만 올리비에는 눈앞의 죽음이 너무나 참혹하고 섬뜩해 어떠한 의혹이나 슬픔도 느낄 겨를이 없었다. 그는 바깥에 있는 베트남인들이 두려움에 사로잡혀있던 이유도 알 것 같았고 집안에 아무도 들어오려 하지 않은 이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또한 이 기묘하고 소름끼치는 현장에서 어서 벗어나고 싶어 자꾸만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런 그의 시야에 그림이 들어왔다. 그림은 벽의 한쪽에 비스듬히 세워져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그림 안에서 올리비에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아름다운 므이가 수줍게 웃고 있었다. 그 조선인 화원이 그린 므이의 초상화가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원이 급하게 오느라 그림을 잊은 것이다.
올리비에는 그림 속 므이와 머리 없는 끔찍한 사체를 번갈아보고는 결심했다. 그림이라도 가져가 아름다운 므이의 모습을 영원히 기억해야겠다고. 그가 발작적으로 그림에 손을 뻗을 때였다. 등 뒤에서 칼날 같은 음성이 날아왔다.
“손대지 마시오!”
올리비에가 흠칫 놀라며 돌아보자 승려 복을 입은 법사가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난 올리비에 중령이다. 이 그림은...”
“그 그림은 아무도 가져가선 안 되오.”
“뭐라고?”
“므이는 그냥 살해된 게 아니오. 저주를 당한 거요. 얼굴과 손발을 잃어버려 자신의 영혼을 찾지 못하고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하는 끔찍한 저주를 말이오.”
“난 저주 같은 건 몰라. 그런 건 너희들 베트남인들에게나 통하겠지. 내가 가져가려는 건 이 그림이지 므이가 아냐. 난 오늘밤 프랑스로 돌아갈 테지만 후임자에게 반드시 살인범들을 잡도록 할 것이다.”
“그 그림도 저주를 받았소.”
“무슨 소리야? 그림이 무슨?”
“얼굴과 손발을 찾아 영원히 이승을 떠돌아야하는 저주받은 원혼에게 그 그림이 어떤 의미를 가지겠소? 므이를 살해한 자들도 옆에 초상화가 있다는 걸 몰랐던 거요. 비록 그림이지만 그 그림은 얼굴과 손발을 잃고 이승을 떠돌 므이의 원혼에게 중요한 것이오. 이제 므이의 원혼은 그 그림에 깃들어 복수를 꿈꿀 것이오! 당신이라고 안전할 것 같소?”
올리비에는 법사를 노려보다가 그림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닥에 누워있는 사체도 시야에 들어왔다. 알 수 없는 꺼림칙한 예감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그림 속에서 수줍게 웃고 있는 므이의 미소가 좀 전과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든 것도 그의 마음에 걸렸다. 법사가 말했다.
“그 그림을 므이의 원혼과 함께 봉인해야만 또 다른 끔찍한 비극을 막을 수 있소.”
올리비에는 신음을 흘리며 그림에서 돌아섰다. 그는 뒤도 한번 돌아보지 않고 므이의 집을 걸어 나왔다. 등 뒤에서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속삭이는 므이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는 것 같았지만 그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올리비에는 곧장 말에 올라 전속력으로 오던 길을 되돌아 달려갔다. 어둠속에서 한참을 질주해 저택에 거의 다다랐을 때 그는 비로소 다시는 므이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가슴 아팠고 참을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멀리 저택 마당에서는 본국으로 돌아가는 배를 타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친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초조하게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아내 리비아가 사람들의 맨 앞에서 그를 향해 힘차게 횃불을 흔들어 보이고 있었다.
올리비에는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 어딘가에서 바람결에 실린 므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영원히 저주할 것이다!’

현재

재환은 엘리베이터를 내리자마자 훅하고 달려드는 역한 피비린내를 맡았다. 눈앞에는 현대적인 차가운 느낌의 오피스텔 건물 복도가 길게 이어져있었고 복도에는 영문을 알 수 없는 꺼림칙함 혹은 불쾌한 공기가 가득 들어차있었다. 재환은 그 답답한 공기를 헤치며 사건현장으로 다가갔다.
307호.
먼저 온 수사관들이 그 안에서 소리 없이 각자의 작업에 열중해 있었다. 방에 들어서며 재환이 받은 느낌은 온통 붉은 빛으로 물들은 색채의 강렬함이었다. 방안 풍경은 흡사 어느 행위예술가의 퍼포먼스를 연상시켰다.
스프레이로 정성껏 뿌려도 결코 쉽지 않을 것 같은 기이한 핏빛의 향연. 방안 구석구석에는 핏방울이 화려하게 수놓아져있었고 그 기묘한 무대의 한가운데 머리 없는 여자가 역시 기묘한 자세로 널브러져 있었다. 란제리차림의 여자는 머리뿐만 아니라 왼쪽발목과 오른손목이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었다. 열심히 후레시를 터뜨리며 사건현장을 촬영하던 감식반 김영철이 고개를 흔들며 다가왔다.
“별의별 잔인한 사건을 다 봤지만 이런 경우는 처음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한시라도 빨리 이 방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사방이 피예요. 보세요, 사람이 한 짓 같지가 않아요. 아무리 미친놈이라도 사람이라면 이렇게 할 수가 없죠.”
재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방문이 안에서 잠겨있었다고 했지?”
“예, 외부에서 침입한 흔적이 전혀 없어요.”
걸음을 걸을 때마다 피로 물든 바닥의 카펫이 질척거렸다. 김영철이 문에 달려있는 부서진 걸쇠를 보여주며 말했다.
“보세요, 안에서 걸쇠까지 잠겨있어서 저희도 문을 강제로 뜯고 들어온 겁니다. 자살이 아닌 다음에야 외부에서 어떻게 사람이 안으로 들어와 이 짓을 해놓을 수가 있겠어요?”
“사람 짓이 아닐 수도 있지.”
“예?”
“전에도 한번 본 적이 있어. 사체의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졌고 사방에 피가 뿌려져 있었지.”
김영철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지는 것을 뒤로 하고 재환은 오피스텔을 나왔다. 그가 걸을 때마다 바닥에는 핏빛 발자국이 유령처럼 그를 따라가는 것만 같았다.



정인은 무엇에 이끌리듯 그림에 빠져 들어갔다. 그림은 액자만으로도 녹녹치 않은 세월을 견뎌왔음을 짐작케 했다. 붉게 이글거리는 석양이 초원을 물들이는 저녁풍경을 황홀한 색채로 표현한 그림. 그 한쪽 구석에 집이 한 채있었다. 콘크리트로 지은 견고한 집과는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엉성한 구조로 기온이 따스한 동남아 어느 지역의 전통가옥을 그린 것 같았다. 집 아래에는 어느 나라 글인지 알아볼 수 없는 기묘한 모양의 글자가 적혀있었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이라면 이 아름답고 나른한 풍경화를 보고 있으면 그림 속에서도 누군가가 자신을 마주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더 그림에 빠져들고 자꾸만 보고 싶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정인은 생각했다.

정인은 지금도 자신이 어느새 그림 앞에 서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림 속의 집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지만 여전히 그림에서 고개를 돌리기가 쉽지 않았다. 마치 그림 속에 뭔가가 그녀의 시선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림은 골동품 수집가인 아빠가 지난주 인사동 화랑에서 사온 것이었다. 정인은 처음 그림을 보았을 때 당연히 외국화가의 작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아빠는 그 그림이 조선후기 이윤수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이라고 했다. 아마 그림 속 풍경이 우리나라가 아니어서 그런 생각이 든 것 같았다.
“너 또 그 그림 보니?”
엄마의 소리에 정인은 겨우 그림에서 시선을 뗐다. 설거지를 마치고 나온 엄마가 신기한 듯 정인을 보며 말했다.
“전에는 아무리 좋은 그림이라도 거들떠보지도 않았잖아. 그 그림은 마음에 들어? 난 별로던데.”
“아냐, 나도 싫어 이 그림.”
“참나, 싫다면서 왜 툭하면 보고 있어?”
“엄마, 여기 아래 적힌 글씨 혹시 무슨 뜻인지 알아?”
“그거? 아빠한테 들었는데... 뭐라고 했더라? 아, 그래. 므이! ‘므이의 집’이란 글씨라고 했어.”
“므이? 대체 어느 나라 사람 이름이 그래?”
“베트남이라던데? 베트남의 어떤 여자이름이래.”
“베트남? 조선후기의 화가가 대체 베트남 여자의 집을 왜 그렸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마침 풍경이 아름다워서 그렸겠지. 참 너 동욱이하고 싸웠니?”
“아니. 왜?”
“그럼 왜 그래? 오늘 같은 날 만나지도 않고. 니들 요새 좀 이상한데?”
“그런 거 아니라니깐!”
정인은 자기도 모르게 신경질을 내고 돌아섰다. 방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등에 대고 엄마가 소리쳤다.
“아니긴 뭐가 아냐! 보니까 딱 그렇구만!”
정인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집안이 울릴 정도로 쾅 소리가 나게 방문을 닫아걸었다. 다시 엄마가 뭐라고 잔소리를 했지만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발작적으로 흔들었다.
확실히 동욱은 변했다. 엄마 말대로 오늘 같은 날 만나기는커녕 아무리 기다려도 전화 한 통조차 없다는 게 그들의 사이를 분명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아무리 회사일이 바쁘고 몸이 좋지 않다고 해도 이건 납득할 수가 없었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다.
정인은 핸드폰을 꺼내 만지작거렸다. 어제도 그는 하루 종일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정인은 다시 그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다. 아무리 지루하게 신호가 가도 동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녀는 망설이다 이번에는 그의 회사로 전화를 걸었다.
“한동욱씨 오늘 결근인데요?”
회사 사람의 말에 정인이 놀라서 되물었다.
“예?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요즘 계속 몸이 안 좋다고 하더니 많이 아픈 모양이더라구요.”
정인은 전화를 끊고 걱정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정말로 몸이 아팠던 거야. 세상에 회사에도 못 나오고 전화도 못 받을 만큼 아프면 대체 얼마나 아픈 거야. 바보같이 그랬으면 나한테 전화라도 하던가. 난 그것도 모르고. 지금쯤 혼자 얼마나 힘들어할까.’
정인은 더 이상 집안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부리나케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가는 길에 화려한 초콜릿도 한 상자 사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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밸런타인데이가 언제 어떻게 생겼는지는 몰라도 그 정체불명의 날이 연인들에게 공식적으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근사한 이벤트를 선물해준 것만은 분명했다. 희수도 동욱에게 줄 초콜릿을 사기위해 북새통을 이루는 백화점 초콜릿매장을 비집고 들어가 간신히 마음에 드는 선물을 골랐다.
최근 유행하는 드림카카오 초콜릿 세트였다. 카카오 함유량에 따라 제각각 다른 맛이 난다는 초콜릿으로 그중에서도 카카오 99% 초콜릿은 충격적일 정도의 쓴 맛이 난다고 했다. 희수는 달콤하고 평범한 초콜릿보다 카카오 99%가 그들의 추억을 훨씬 특별하게 만들어 주리라 여겼다.
희수는 초콜릿을 들고 동욱의 아파트로 향했다. 본격적으로 사귄지 불과 한 달 밖에 되지 않았지만 둘은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처럼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아마도 몰래하는 사랑이 주는 스릴과 안타까움이 더 그런 감정을 부추긴 건지도 모른다. 희수는 아주 예전부터 동욱을 좋아했다. 그가 정인과 사귀기 이전에도 좋아했고 정인과 사귀는 동안에도 단 한번 그를 잊어본 적이 없었다.
희수는 설레는 기분을 안고 동욱의 아파트 초인종을 눌렀다. 하지만 안에선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녀가 주위를 살핀 후 문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오빠! 나야, 희수.”
그제야 안에서 찰칵하고 문이 열리고 핼쑥한 얼굴의 동욱이 고개를 내밀었다.
“미리 핸드폰을 하지.”
“그럼 재미없잖아. 어이구 우리 자기 많이 아팠져?”
동욱이 고개를 빼고 불안하게 주변을 살피자 희수가 물었다.
“왜 그래?”
“아니, 방금 전에 누가 계속 벨을 눌리더라고. 그래서 모른 척하고 가만있었거든.”
“무슨 죄졌냐?”
“야, 여기서 이러다 정인이한테 걸리면... 알지? 어서 들어가자.”
“뭐 어때? 자기가 정인이하고 결혼을 했어? 뭘 했어? 구더기 무서워서 장 못 담그나? 연애하다가 아니다 싶으면 헤어지고 그러는 거지.”
“물론 그렇긴 한데 뒤가 시끄럽잖아.”
“그럼 영원히 이렇게 숨어서 만나자고?”
“물론 말할 거야. 언젠가는. 뭐해? 계속 문 열고 서있을 거야? 나 감기몸살이야, 추워.”
“피이~”
희수는 입을 삐죽거리다가 금방 깔깔거리며 집안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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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소리를 다 듣고 문이 닫히는 소리까지 확인한 정인은 아파트 비상계단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동욱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 여자가 다름 아닌 희수라는 사실이 그녀에겐 더욱 충격적이었다. 희수는 고등학교 때부터 단짝이었고 대학도 같은 학교라 동욱을 만날 때도 늘 함께 어울리곤 했었다.
그런 희수가 어떻게. 동욱과 자신이 결혼 약속한 것도 알고 그의 아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누구보다 잘 아는 희수가 어떻게!
정인은 몸서리를 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들고 있던 초콜릿 상자를 바닥에 내던지고 하이힐로 미친 듯이 짓밟았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저것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손이 파르르 떨렸고 눈에선 불꽃이 일었다. 그동안 쌓아왔던 두 사람에 대한 배신의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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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가 초콜릿 조각을 손에 들고 동욱에게 ‘아’하고 말했다.
“이게 뭔데? 초콜릿이야?”
“그렇다니깐. 카카오99%라고 요즘 엄청 유행하는 초콜릿이야.”
“그래? 근데 왜 난 처음 들어보지?”
“지금 알면 됐잖아. 우선 맛부터 봐보라니깐.”
희수가 억지로 초콜릿을 입안에 밀어 넣었고 동욱이 초콜릿을 씹었다. 하지만 잠시 후 동욱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으악~ 이거 뭐야? 이게 무슨 초콜릿이야.”
동욱이 괴로워하며 초콜릿을 뱉기 위해 일어나려하자 희수가 그를 붙잡았다.
“날 위해서 그 정도도 못 참아?”
“이거랑 너랑 무슨 상관인데?”
“아무튼 내가 자기주려고 사온 거잖아. 밸런타인 초콜릿. 그러니까 자기야, 뱉지 말고 그냥 먹어.”
“야, 너 한번 먹어봐라. 이게 사람이 먹는 음식인가. 아우 미치겠다. 야, 진짜 안 되겠다!”
“잠깐!”
희수가 동욱을 붙잡더니 그의 입에 키스를 했다. 한참 후 그녀가 입을 떼고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자기 입속에 있어서 그런지 드림카카오99도 달콤하네. 내가 다 먹었어.”
“그러다 감기 옮으면 어쩌려고 그래?”
“난 자기 거라면 감기도 괜찮아.”
“뭐?”
동욱이 어이없다는 듯 웃자 희수가 다시 그의 목을 감싸 안고 키스하려고 할 때였다. 벨이 울렸다. 희수가 먼저 놀란 얼굴로 그를 쳐다봤고 동욱도 찡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희수가 팔을 풀며 불안하게 물었다.
“누구야? 올 사람 있어?”
동욱이 조용히 하라는 표시로 손가락을 입에 갖다 댔다.
“아까도 누가 벨만 누르다 갔어. 조용히 있으면 그냥 갈 거야.”
하지만 바깥의 누군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 누군가는 집요하고도 끈질기게 계속 영원히 그럴 것처럼 벨을 눌러댔다.
“뭐야? 대체 누군데 벨을 저렇게 눌러?”
희수의 말에 동욱도 참지 못하고 욕설을 뱉어냈다.
“어떤 개새끼야? 옆집 애들이 장난하는 건가?”
“그러지 말고 나가봐 좀! 계속 벨 누르니까 불안해서 못 참겠어!”
희수가 짜증을 내고 나서야 동욱은 현관으로 걸어 나갔다. 그는 문에 귀를 대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요?”
바깥에서는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는 이번에는 좀 더 크고 분명하게 소리를 질렀다.
“밖에 누군데 그렇게 벨을 눌러요?”
여전히 밖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제야 동욱도 짜증이 났다.
“어떤 씹할 놈이 장난을 쳐!”
그가 욕설을 뇌까리며 벌컥 문을 여는 순간 누군가가 악을 쓰며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미처 막을 사이도 없었다. 동욱도 놀라서 옆으로 피할 정도였다. 갑자기 뛰어들어 돌진해오는 정인을 보고 기절할 것처럼 경악한 사람은 희수였다. 정인은 희수가 ‘악’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다.
“야, 이년아! 니가 사람이야? 니가 친구야?”
정인은 머리채를 잡아 흔들면서 정신없이 희수에게 주먹질과 발길질을 해댔다. 희수는 바닥에 웅크린 채 고통스럽게 비명을 질러댔다. 뒤늦게 번쩍 정신이 든 동욱이 황급히 달려와 정인의 손을 제지하며 소리쳤다.
“대체 왜이래? 그만해!”
하지만 정인은 희수의 머리카락을 놓지 않았다.
“이거 놔! 놓으란 말야! 정인아, 제발!”
동욱이 억지로 정인의 손을 풀었다. 이번에는 정인이 발버둥을 치며 동욱에게 악을 써댔다.
“아니라고 말해! 오해라고 말해! 실수였다고 말해 어서! 이 개자식아!”
동욱이 소리를 질렀다.
“말하려고 그랬어! 사실대로 얘기하려고 그랬다고! 희수 좋아한다고!”
정인이 울음을 그치고는 번쩍 고개를 쳐들었다.
“방금 뭐라고 그랬어?”
“너한테 진짜 미안한대, 나 희수 사랑해!”
정인이 넋 나간 사람처럼 동욱을 보다가 억양 없이 중얼거렸다.
“그럼, 우리 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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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나 이 ‘므이의 집’ 내 방에 걸어놓으면 안 돼?”
정인이 거실에 있던 그림을 떼어내 손에 들고 말했다. 그녀의 표정이 심상치 않아 엄마는 가슴이 철렁했다. 혹시 동욱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짐작하기도 했다.
“생전 그림은 보지도 않던 애가 갑자기 왜 그래? 아까 낮에는 싫다고 했잖아.”
“아니, 지금은 좋아졌어. 이 그림 보고 있으니까 왠지 위안이 되고 마음이 편해져. 나 이 그림 내방에 걸어 놓을게. 아빠 오면 엄마가 말 좀 해줘.”
정인은 엄마를 쳐다보지도 않고 그림을 방으로 가져와 침대위에 세워놓았다. 이상했다. 동욱의 집을 나선 후 두 사람을 저주하며 미친년처럼 거리를 헤매 다녔다. 그런데 문득 이 그림이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마치 견딜 수 없이 갈증이 느껴질 때 오아시스를 떠올렸을 때처럼 그림을 떠올리자 견딜 수 없이 가슴을 짓누르던 분노와 증오의 감정이 거짓말처럼 해소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림은 그녀에게 뜻밖의 위안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림 속 뭔가가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그런 기이한 기분. 그녀는 그림에 대고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죽여 버리고 싶어.”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왜 이 그림에 대고 그런 말을 하는지.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은 다음 순간에 일어났다. 그녀는 그 말이 자신이 한 말인지조차도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몸을 떨며 그림에 대고 말했다.
“희수 년을 정말 죽여 버리고 싶단 말야. 므이야... 제발 도와줘!”
말을 마친 정인은 깜짝 놀랐다. 맙소사, 므이라니. 게다가 그 낯선 이름이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정인은 그림 속 므이의 집을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러자 정말 그 안에 누가 있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그림의 집안에서 누군가가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집안을 천천히 오가기도 하고 창밖을 내다보기도 하는 그런 느낌. 정인은 알 수 없는 오싹한 예감에 얼른 그림을 벽 쪽으로 돌려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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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수가 동욱의 집을 나선 건 자정이 가까워서였다. 정인에게 폭행당해 머리도 한 움큼 빠졌고 얼굴에도 손톱자국이 남아 쓰라렸지만 차라리 마음은 편했다. 동욱이 몸만 괜찮았다면 그의 곁에서 잠들고 싶었다.
희수는 여러 복잡한 심경을 뒤로 하고 동욱의 집을 나섰다. 거리로 나서는 순간 한기가 그녀를 휘감아왔다. 희수는 택시를 타기 위해 큰 도로변까지 걸음을 재촉하며 계속 뒬르 돌아봤다. 아파트를 나선 직후부터 한기와 함께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이 계속 따라오는 것 같아 겁이 났던 것이다.
희수의 하이힐소리가 적막한 새벽공기를 갈랐다. 소리는 그녀의 심장을 쿵쿵 두드릴 정도로 크게 들렸다. 차갑고 을씨년스러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놀랍게도 바람은 따스한 남쪽나라에서 불어온 것 같은 온기를 품고 있었다.
바람이 뺨과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가는 순간 희수는 훅하고 신음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온몸에는 소름이 돋았다. 바람결에 현기증이 날 정도의 비릿하면서도 역겨운 피비린내가 섞여있었기 때문이었다. 희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정신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2월 15일. 아직은 찬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야할 늦겨울인데 피비린내가 실린 더운 바람이라니. 게다가 그 바람엔 사뭇 낯설면서도 이국적인 향취가 배어있었다. 희수는 정신없이 달렸다. 어느새 몸에선 땀이 배어나왔다. 달린 탓도 있겠지만 찰거머리처럼 그녀를 따라붙는 한여름 같은 더운 공기 때문이었다.
두려움 때문에 입에서는 자꾸만 울음이 새나올 것만 같았다. 등 뒤에서 소름이 끼칠 정도로 위협적인 소리가 들려왔다. 소리는 바람의 기운 만큼이나 낯설고 이국적이었다.
누군가가, 아니 뭔가가 소리를 지르며 멀리서부터 빠르게 그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한명이 아닌 여러 명의 위협적인 발소리가 꿈결처럼 비현실적인 느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숨이 턱까지 차올랐지만 희수는 발길을 늦출 수가 없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따라오는 누군가가 계속 ‘므이!’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도망가는 순간에도 희수는 ‘므이’가 무슨 뜻인지 너무나 궁금했다.
급작스럽게 피비린내가 확하고 뒤쪽에서 덮쳐왔다. 희수는 본능적으로 비명을 지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놀랍게도 그녀의 등 뒤에서 붉은 빛을 띤 회오리바람이 바닥을 쓸며 빠르게 몰려오고 있었다.
“저게... 뭐야?”
회오리바람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고 희수는 기절할 것 같은 기분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회오리바람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는 순간 귓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렴풋이 ‘므이’ 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 시큰하면서도 서늘한 바람이 발목을 가르고 지나갔다. 희수는 비명을 지르며 중심을 잃었다. 왼쪽 발목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지며 몸이 기울었다. 사라진 발목 때문에 희수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벽을 짚었다.
회오리바람이 아래에서 위로 타고 올라왔다. 이번에는 오른손목에서 타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희수는 벽을 짚었던 손을 놓고 비틀거리며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회오리바람은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가슴을 지나 얼굴까지 올라왔다. 후각을 마비시킬 정도의 피비린내로 희수는 숨조차 내쉴 수가 없었다.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핏빛회오리는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로 피를 뿌리는 피의 소용돌이였다. 회오리에 갇힌 희수의 몸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어갔다. 그녀는 너무 무서워 비명조차 지를 수가 없었다.
잠시 후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녀의 머리가 목에서 분리되어 바닥에 툭 떨어졌다. 머리는 바닥을 데굴데굴 굴러갔다. 기이한 표정으로 굴러가던 머리는 벽에 부딪혀 멎었다. 정인이 할퀸 손톱자국이 선명한 희수의 머리는 그때까지도 공포에 사로잡혀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이한이 아버지의 전화를 받은 건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바깥에선 장마철의 굵은 빗줄기가 창문을 요란하게 두들기고 있었고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식구들이 잠든 후 2층 작업실에 처박혀 소설 집필에 몰두해 있었다. 이번 작품은 그의 일곱 번째 추리소설이었고 마지막 반전부분을 쓰느라 신경이 극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소설 속 장면에 너무 몰두해있던 나머지 전화벨이 울렸을 때 이한은 ‘악’ 소리가 날 정도로 놀랐다. 타이밍이 워낙 절묘하기도 했지만 오늘처럼 을씨년스러운 날씨에 그것도 이런 야심한 시각에 울리는 전화벨은 충분히 불길하고 꺼림칙했다. 그의 소설에도 불행을 알리는 전화벨은 늘 새벽시간에 울리곤 했으니까.
“여보세요?”
한껏 잠긴 그의 소리가 건너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 저편에서 흐느끼는 신음이 들려왔다.
“누... 누구요?”
이한은 심장이 오그라드는 전율을 느끼며 되물었다. 그러자 핸드폰에서 뜻밖의 음성이 건너왔다. 다름 아닌 아버지였다.
“이한아!”
그를 부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불안정하면서도 고통스럽게 들렸다.
“아버지?”
이한이 놀라 소리치자 다급한 숨을 몰아쉬며 아버지가 말했다. 하지만 그 말은 이한이 도저히 납득하기 힘든 얘기였다.
“이한아... 네 어머니가... 날... 죽이려드는구나.”
이한은 잠시 할 말을 잃고 입을 벌렸다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엄마가 아버지를 죽이려들다니요?”
“아무래도... 저주가 다시 시작된 것 같구나.”
“아버지! 대체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 그림은 저주받은 그림이 틀림없다! 그걸 되찾아오는 게 아니었어!”
“아버지! 지금 무슨 소리하시는 거예요? 엄마 좀 바꿔주세요. 어서요!”
“네 어머니는... 지금 내 옆에 서서 날 노려보고 있다. 손에는 날 찌른 칼을 들고서. 아니다, 저건 그 사람이 아니다. 네 어머니가 아니야. 저주가 네 어머니에게 쓰인 게야. 이한아 내게 무슨 일이 생기거든 그 그림도 태워버려라.”
“아버지 제가 지금 그리로 갈게요. 꼼짝 말고 그대로 계세요. 아셨죠?”
이한이 막 핸드폰을 끊고 방을 나서려할 때였다. 핸드폰에서 아버지의 위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이러지마. 제발 정신 좀 차려. 이러지마, 여보! 제발!”
“엄마! 왜 그래요? 엄마!”
순간 핸드폰에서 소름끼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바로 어머니의 기이한 비명소리와 아버지의 고통스러운 울부짖음이었다. 단발마의 비명과 소리들은 섬뜩하게 고막을 파고들다가 급작스럽게 잦아들었다. 이한은 전율 속에 숨을 멈추고 핸드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수화기에서는 더 이상 어떠한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고 불길한 적막과 두려움만 그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여 . 보 . 세 . 요?”
이한이 떨리는 음성으로 조심스럽게 소리를 냈다. 누군가 전화를 받는 기척이 전해졌다. 이한은 다시 숨을 죽였다. 상대도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수화기만 든 채 숨소리를 뱉어냈다. 숨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다.
“엄마? 엄마예요?”
이한이 기어드는 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상대는 여전히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고 색색거리는 숨결은 더욱 집요하게 귓전을 파고들었다. 누군가 전화를 들고 있다는 확실한 느낌이 있는데 상대가 말을 하지 않으니 마음에는 점점 두려움이 쌓여갔다.
새삼 아버지가 말한 저주란 단어가 웅웅거리며 머릿속을 떠돌았다. 대체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은 누구란 말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 서늘한 숨결이 바로 곁에서 미풍처럼 귓전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이한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꺼림칙한 물건을 팽개치듯 핸드폰을 내던졌다. 마침 그가 지르는 소리에 잠이 깬 현경이 불안한 얼굴로 방문을 열어젖혔다.
“여보, 왜 그래?”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몸을 떨고 있는 이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여보.”
“아버지야.”
“뭐?”
“아버지하고 엄마한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아.”
현경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무슨 일이라니?”
“아직은 나도 잘 모르겠지만 엄마가... 아버지를... 아버지를 죽이려고 한대.”
이한이 힘겹게 말하자 현경이 신음과 함께 양손으로 입을 가렸다.
“가봐야겠어.”
이한이 1층으로 내려가 현관문을 열어젖히자 귀가 멍멍할 정도의 세찬 빗소리가 순식간에 그를 에워쌌다. 일기예보에서는 낮부터 엄청나게 퍼붓기 시작한 장맛비로 전국곳곳에 홍수주의보가 내려졌다고 했다. 이한은 폭우가 쏟아지는 마당으로 달려 나갔다.
그렇잖아도 소름이 돋은 몸에 차가운 빗물이 닿자 한여름인데도 이가 딱딱 부딪힐 정도로 추웠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차문을 열고 타기까지 불과 10여초의 시간동안 온몸이 비에 완전히 젖어 좌석에 물이 뚝뚝 떨어졌다. 황급히 시동을 걸고 와이퍼를 최고 속도로 작동시켰지만 엄청난 빗물을 털어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헤드라이트를 켜고 막 마당을 벗어나려는데 현경이 차문 옆으로 달려 나왔다. 이한이 창문을 내리자 비에 흠뻑 젖은 그녀가 불안하면서도 간절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제발 조심해. 우리 애들을 생각해서라도. 지난번에 아버님이 그랬잖아. 저주가 다시 우리 집안을 찾아온 것 같다고. 그래서 당신 보고도 오지 말라고. 거기 가면 당신한테도.”
“닥쳐! 저주 같은 게 어딨다고 그래!”
이한은 소리를 지르며 액셀을 밟았다. 바퀴 미끄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차가 퉁기듯 앞으로 달려 나갔다. 불길한 얼굴을 한 현경의 모습이 백미러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차는 빗물로 번들거리는 도로 위를 무섭게 질주했다. 시커먼 괴물로 변한 도로는 헤드라이트 불빛을 완전히 집어삼켜 차선은 물론 중앙선도 보이지 않았다. 차창에는 금방 뿌옇게 김이 서려 시야가 극도로 좁아들었다.
아버지 집은 경기도 광주의 천진암이었다. 평소 이런 새벽이라면 길동인 그의 집에서 30분도 채 안 걸릴 거리지만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랐다. 이한은 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한 후 차에서 핸드폰으로 아버지 집에 전화를 했다. 몇 번 신호가 갔지만 받는 사람이 없었다. 막 전화를 끊으려 할 때였다. 누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버지?”
이한이 소리쳤지만 상대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기묘한 침묵이 기분 나쁜 숨소리를 동반하고 넘어왔다.
“엄마예요?”
이한은 아까보다 훨씬 작은 소리로 말했다. 이번에도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누구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이상하게 소리가 새나오지 않았다. 이한은 그대로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그 사이 온몸에 깨알 같은 소름이 돋아나있었다.
아버지 집에 도착했을 때는 새벽 4시가 가까운 시각이었다. 아버지 집은 일반 전원주택단지에서도 따로 떨어진 곳에 지었다. 평소에도 밝은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데다 불길한 상상까지 겹쳐 집은 그 어느 때보다 을씨년스럽고 으스스해보였다.
이한은 차를 마당에 세운 뒤 내렸다. 굵은 빗방울이 몸을 두드려댔지만 아무런 감각도 느낄 수가 없었다. 거실에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는데 커튼이 쳐져있어 안쪽 상황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안에서 아버지가 생사의 기로를 헤매고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예감이 그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다.
이한은 안으로 들어서는 대신 전화를 먼저 걸었다. 집안에서 울리는 전화벨소리가 문밖까지 들려왔다. 전화는 거실에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거실을 가리고 있는 커튼을 노려보았다. 공허한 전화벨이 여러 차례 울렸을 때 커튼 너머로 불쑥 그림자가 나타났다. 이한은 자기도 모르게 훅하고 숨을 삼켰다. 그림자가 전화를 받았다. 단순히 형태만 봐서는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이번에는 이한도 곧바로 소리를 내지 않고 숨을 죽였다. 상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한은 전화를 귀에 대고 그림자를 노려보며 천천히 현관문을 열었다. 문을 여는 순간 피비린내가 코끝에 끼쳐왔다. 냄새는 머리가 어질할 정도로 강렬했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방망이질했다. 그는 집안으로 들어섰고 모퉁이만 돌면 전화를 받고 있는 그림자의 정체를 볼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도는데 숨결이 거칠어졌고 다음 순간 거실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한은 전율에 휩싸이며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피가 흥건한 거실의 끔찍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핸드폰에서는 여전히 누군가의 색색거리는 숨결이 들려오는데 정작 거실에는 전화를 받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수화기도 얌전히 전화기 위에 놓여있었다. 분명 그는 그림자를 보았는데. 이한은 떨리는 음성으로 전화에 대고 속삭였다.
"당신... 누구요?“
숨소리가 더욱 생생하게 귓전을 울렸다. 이한은 발작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자꾸만 몸이 떨려왔다. 비록 보이지는 않았지만 찌르는 것처럼 강렬한 누군가의 시선이 눈앞 허공에서 느껴졌다.
“아냐, 그럴 리가 없어.”
이한은 필사적으로 버티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거실의 전화벨이 울렸다. 한참을 울린 끝에 딸깍하고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에서 예의 그 숨결이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다. 이한은 그 소리가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눈앞에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구별할 수가 없었다.
이한은 허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뒷걸음질을 쳐서 다시 모퉁이를 돌아나갔다. 거실이 눈앞에서 사라진 것만으로도 막혔던 숨이 토해져 나왔다. 그는 현관문을 벗어나 마당으로 나왔다.
하지만 마당에서 보이는 거실의 모습을 본 순간 그는 신음을 흘리며 거칠게 핸드폰 폴더를 닫았다. 커튼 너머로 보이는 거실에 누군가의 그림자가 또렷하게 보였던 것이다. 입에서 자꾸만 신음이 새나오고 몸이 떨려왔다. 도저히 집안으로 다시 들어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언뜻 본 거실 바닥에는 핏물이 흥건했고 벽에는 피 철갑이 되어 있었다. 설혹 그 피가 부모님의 것이라 해도 그는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아니, 지금 이렇게 밖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무서웠다. 무서워서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최대한 신속하게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이한은 자꾸만 뒷걸음질 쳐서 집으로부터 멀어졌다.
그때였다. 미동도 하지 않던 커튼너머의 그림자가 고개를 돌렸다. 마치 거기 있다는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그림자의 시선은 똑바로 이한을 향했다. 이한은 그 시선 앞에서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림자가 움직였다. 이한은 숨을 다잡았다. 그림자는 현관문 방향으로 사라졌다. 이한의 동공이 그 어느 때보다 커지고 있었다. 그의 부풀어 오른 두 눈이 현관문으로 향했다. 그는 뚫어지게 문의 입구를 노려보았다.
“헉!”
이한은 쓰러질 듯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발자국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 어떤 형체도 없이 피로 물든 발자국이 거실 바닥을 걸어와 현관 입구에 멈춰 섰다. 잠시 미동도 하지 않던 발자국이 이한을 향해 돌아섰다. 더불어 아까 거실에서 느꼈던 누군가의 따가운 시선도 다시 느껴졌다. 핏빛 발자국이 현관문을 나섰다. 이한은 한걸음 더 뒤로 물러났다. 발자국이 그를 쫓아왔다. 젖은 마당에 흐릿하게 흔적을 남기며 발자국이 이한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이한은 자동차로 달려갔다. 발자국도 그를 쫓아왔다. 이한이 간신히 차에 올라탄 다음 허겁지겁 문을 걸어 잠갔다. 하지만 그런 물리적인 조치가 저런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소용이 있을까. 손이 덜덜 떨려 시동키를 꽂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차창 유리에 손을 짚자 이한은 펄쩍 뛰듯이 놀라며 비명을 질렀다. 손은 보이지 않았지만 차창 유리에는 손바닥 자국이 선명했다. 이한은 정신없이 액셀을 밟았고 차가 빗속으로 튕겨져 나갔다. 그는 그제야 헤드라이트를 켜고 연신 백미러와 룸미러를 살폈다. 하지만 거울에는 그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폭우 속에서 음산한 기운을 내뿜는 아버지의 집이, 그의 유년과 가족의 소중한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그 집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운명처럼 빠르게 멀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한은 경찰에 신고를 한 후 그들과 함께 다시 아버지 집을 찾았다. 경찰들이 분주하게 집안을 드나드는 동안에도 그는 바깥에만 서있었다. 경찰로부터 현장을 확인해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까지도 그는 집안으로 들어설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날씨는 흐렸고 습도도 높았다.
“안에 시신이 두 구 있습니다. 신원을 확인해주셔야겠습니다.”
시신이 두 구라는 소리가 비현실적인 환청처럼 아득하게 들려왔다. 이한은 아직도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거실로 올라섰다. 핏자국이 길게 서재로 나있었다. 아버지는 칼에 찔린 후 서재로 달아난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아버지가 만들어놓은 피의 길을 밟으며 서재로 따라 들어간 흔적이 남아있었다.
이한은 서재로 다가갔다. 형사들이 증거나 단서가 될 만한 것들을 조사하느라 서재를 발칵 뒤집은 소동의 한가운데 온몸이 피투성이인 아버지가 대자로 뻗어있었다. 이한은 그 낯선 충격에 한동안 눈을 감고 숨을 고른 후 다시 떴다. 옆에서 경찰이 말했다.
“여기...”
경찰의 소리에 무심코 눈을 돌리다가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그 시선은 경찰들에 의해 가려져있어 보지 못했던 또 한 구의 사체였다. 사체는 다름 아닌 그의 엄마였다. 엄마는 목에 밧줄을 매달고 눈을 부릅뜬 채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똑바로 이한을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의 손에는 피 묻은 칼이 들려 있었다. 네 엄마가 날 죽이려한다던 아버지의 절규를 떠올리자 섬뜩하게 오한이 일었다.
“김재환 형삽니다. 부모님이 맞으시죠?”
형사의 물음에 이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사가 거실로 나가더니 그를 불렀다.
“혹시... 이 그림에 대해 아시는 게 있습니까?”
형사가 그림에 대해 묻자 이한은 내심 놀랐다.
“예? 왜요?”
“제가 이 그림을 전에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서요.”
“그래요? 그 그림은 저희 증조부가 그린 겁니다만 어디서 저 그림을?”
형사가 묘한 표정을 짓고 말했다.
“뭐, 별 건 아닙니다. 그림이 이한씨 부모님의 죽음에 관여했을 리도 없고.”
“예?”
이한은 형사의 말이 뭘 의미하는지 몰라 반문했지만 형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이미 그에게서 등을 돌린 뒤였다.

++++++++++

이한은 김재환 형사와 조사실에 마주 앉아 참고인 조서를 작성 중이었다. 형사는 이한이 전날 낮 시간부터 무엇을 했고 어떻게 아버지 집에 가게 되었는지에 대해 자세하게 캐물었다.
“정말로 이한씨의 아버님인 이정수씨가 그렇게 말했단 말이죠?”
“예, 아버지로부터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을 죽이려한다고.”
“그것과 관련해 뭐 짚이는 구석이라도 있습니까? 흔한 일은 아니잖습니까? 아내가 남편을 죽인다는 게. 그것도 노부부가 말입니다.”
이한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난감했다. 진짜 얘기를 전혀 하지 않고 형사를 납득시킬 수 있을까. 어쩌면 그건 귀신이니 저주니 하는 얘기를 들려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될 수도 있었고 지금의 상황을 더욱 어려운 지경으로 몰아갈 수도 있었다.
“혹시 형사님은 저주라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노트북 자판을 두들기던 형사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저주요?”
“예. 저주.”
형사가 이쪽의 의도를 살피려는 듯 미간을 찡그렸다.
“어떻게 생각하다니요?”
“그런 걸 믿는지 믿지 않는지.”그는 바로 대답하는 대신 노트북 자판에서 손을 떼고 양해를 구한 후 담배를 피워 물었다. 그는 연기를 뿜어내며 생각에 잠긴 모습으로 이한을 바라봤다.
“형사님이 믿든 안 믿든 이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제 행동이나 저희 어머니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조사를 해보시면 알겠지만 저희 집안에서는 아내가 남편을 죽인 사건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형사의 눈에서 반짝하고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증조부와 어제 아버지까지 이런 사건이 두 번째입니다. 증조부도 저희 증조모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거의 변화가 없던 형사의 얼굴에도 놀란 표정이 드러났다.?
“그게... 정말입니까?”
“예.”
“이유는요?”
“질투 때문이었다고 하더군요.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의부증이라고 할 수 있겠죠.”
“조선후기에 의부증 때문에 남편을 죽였다고요?”
“네. 납득하기 어렵지만 사실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 어머니도 증조모처럼 남편을 죽이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어요.”
형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그럼, 조부는?”
“다행히 할아버지께서는 아무런 사고 없이 수를 누리다 돌아가셨습니다.”
“아내가 남편을 죽이는 일이 흔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 정도로 저주라고 하기엔...”
“아까 김 형사님이 보던 그림이요.”
그림이란 말에 형사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 그림은 ‘므이의 집’이라는 그림입니다.”
“므이의 집?”
“예, 저도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그림은 증조부가 베트남에 가서 그린 그림이라고 합니다. 증조부가 변을 당하고 돌아가신 후 무슨 이유인지 할아버지께서는 그 그림에 저주가 붙어있다고 믿었습니다.”
형사가 끙 하고 신음을 흘렸다.
“증조부가 돌아가시자마자 할아버지는 그 그림을 내다 팔았다고 합니다. 처음엔 그림을 아예 불태우려고 하였으나 무슨 사정인지 그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럼 할아버지께서는 그림을 내다 팔았기 때문에 저주를 면했다?”
“저도 어제 아버지가 변을 당하기 전까지는 믿지 않았어요.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내다 팔았던 그 그림을 50년 만에 되찾아왔거든요.”
형사의 입에서 또다시 끙 하고 신음이 새나왔다.



경찰에서는 약 2주간의 조사 끝에 어머니가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관계를 그대로 수긍하고 수사를 종결지었다. 그리고 당시 사건을 담당해 이한을 조사했던 김재환 형사가 무슨 일인지 직접 집까지 찾아왔다.
마침 집에 아무도 없어 이한은 형사를 거실로 불러들여 얘기를 나눴다. 형사는 처음 경찰서 조사실에서 봤던 날카롭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달라져있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간단히 수사종결에 대한 결과를 전하고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저도 그때 하지 못한 얘기가 있습니다.”
“하지 못한 얘기라니요?”
“제가 지난번에 그랬죠? 그 그림 예전에 본 적이 있다고.”
그렇게 입을 연 형사는 그림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세 건의 살인사건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 희생자의 왼쪽발목과 오른손목 그리고 머리가 사라지고 사방으로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사람이 한 짓이라고 보기 어려웠어요.”
“그들의 죽음이 그림과 무슨 상관이죠?”
“살인사건이기 때문에 주변인물에 대한 조사를 했는데 피살자와 원한관계에 있던 용의자가 그 그림, 즉 ‘므이의 집’을 소장하고 있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본 세 건의 살인사건 중 두 건에서 그와 같은 사실관계를 확인했습니다. 첫 번째 희생자는 자기 오피스텔에서 피살당했는데 그녀는 유부남을 사랑했더군요. 저희는 자연스럽게 남자의 부인을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집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그 집 거실에 ‘므이의 집’이 걸려 있었어요. 그리고 다시 몇 년 후 같은 그림을 비슷한 사건의 또 다른 희생자와 연적관계에 있던 여자의 집에서 보게 되었습니다. 희생자는 김희수라는 여자였는데 그녀는 친구인 이정인의 애인을 몰래 만나고 있었습니다. 나중에 애인을 빼앗긴 이정인을 조사하러 갔더니 놀랍게도 그녀의 방에도 그 그림이 걸려있더군요.”
이한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움츠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그럼 그 사건들은 어떻게 됐습니까? 그림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한 짓인가요?”
“아니요, 혹시 몰라 그들을 추궁했더니 나중에는 단지 마음속으로만 저주해달라고 그림에 대고 빌었다는 겁니다. 당시 전 그 말을 믿지 않았어요.”
“그림에 대고 빌었다구요?”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당사자들은 분명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저희 집하고는 상황이 좀 다른 것 같은데요. 저희 증조부나 아버지 같은 경우에는...”
“물론 앞서 말한 끔찍한 신체훼손과는 양상이 다르죠. 하지만 앞서 말한 두 사건과 공통점이 있습니다.”
“공통점이라니요?”
“살인의 동기가 모두 질투에서 비롯됐다는 겁니다.”
이한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의부증 때문에 남편을 살해한 경우, 연적관계에 있는 여자를 저주한 경우 모두 그 동기에는 질투라는 감정이 끼어들어 있습니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 그림에는 질투로 살인을 부르는 저주가 담겨 있는 것 같습니다. 우습죠? 명색이 형사라는 작자가 저주니 뭐니 하니까. 하지만 그 살인의 현장을 봤다면 이해하실 겁니다.”
이한은 알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차가우리만치 차분한 형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형사가 은근하게 말했다.
“그림을 어떻게 하실 겁니까?”
“글쎄요, 아직은...”
“불태워버리십시오!”
이한이 깜짝 놀라 돌아보자 이글거리는 형사의 눈이 그를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저주가 정말 맞다면 부인이 이한씨를 죽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아니면 또 다른 희생자가 생기든가.”
현경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말에 이한의 표정이 일그러지자 재환이 명함을 건네며 말했다.
“일테면 그럴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다면 전화 주십시오.”

++++++++++

이한은 경찰조사가 끝나고 처음으로 아버지 집을 찾았다. 집안에는 선명한 핏자국을 비롯해 끔찍한 살인의 흔적들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그 현장의 한가운데 아버지가 평생 찾아다녔다는 그림 ‘므이의 집’이 걸려있었다. 석양에 물든 초원과 므이의 집.
정말 이 그림에 저주가 담겨있는 것일까.
이한은 마치 그 안에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의혹에 휩싸여 뚫어지게 그림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노려봐도 그림은 그림일 뿐이었다. 명색이 추리작가라는 작자가 형사의 말에 겁을 먹고 조상의 소중한 그림을 불태운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정말 저주가 있다면 오히려 밝혀야하지 않을까.
묘한 건 그림을 보면 볼수록 점점 그 안으로 빨려드는 느낌이 든다는 점이었다. 초원의 훈훈한 바람이 귓불을 스치는 것 같고 석양은 그림 밖까지 뻗어 나와 그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것 같았다. 이한은 그림 속의 집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은 느낌까지 받았다. 그를 상념에서 깨운 건 핸드폰소리였다. 현경이었다.
“왜 아직도 안와? 저녁 먹을 시간인데.”
“저녁? 지금이 몇 신데 벌써 저녁을 먹어?”
그러면서 시계를 보던 이한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시간이 저녁 7시가 다 되었던 것이다. 그는 뭔가에 홀린 기분으로 그림을 돌아보았다. 착각한 게 아니라면 그는 자그마치 6시간이 넘도록 그림을 들여다보고 있었던 셈이었던 것이다.

++++++++++

이한은 아버지 집에 있던 그림을 그의 집으로 가져왔다. 붉게 이글거리는 석양. 황홀한 색채로 초원을 물들이는 저녁풍경. 그리고 그림의 한쪽 구석에 소리 없이 자리하고 있는 한 채의 집. 이제 ‘므이의 집’은 그의 집 거실에 걸려있었고 이한은 언제든 그림을 볼 수 있었다.
므이.
대체 누구의 이름일까.
증조부는 왜 베트남까지 가서 므이도 아닌 므이의 집을 그린 것일까.
무수한 의혹들이 비로소 가슴 한가운데서 뭉게뭉게 피어올라 심장을 뜨겁게 두드렸다. 그 뜨거운 열기에 휩싸여 이한은 눈을 감았고 이내 생각은 100여 년 전으로 빠르게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했다.

며칠 후

오늘도 2층 서재에 들어간 이한은 밤이 늦도록 방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았다. 시아버지 집에 있던 물건들이 집에 들어온 후부터 이한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 처음엔 집안에서 일어난 끔찍한 일에 대한 충격 때문이려니 했는데 딱히 그것도 아닌 것 같았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고 심지어 마주앉아 있을 때조차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생각이 다른 곳에 가있는 것 같았다. 현경은 그런 시간과 검정을 견뎌내기가 힘들었다. 현경은 이한과 자신 사이에 정체를 알 수 없는 높고 두꺼운 벽이 가로놓여있다는 걸 예감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벽의 정체가 무엇인지 그녀는 짐작도하기 힘들었다.
이한에게 신경을 쓴 탓인지 갈수록 신경은 예민해지고 불안해졌다. 이유도 없이 무턱대고 찾아드는 우울증도 그녀를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밤이 되면 불안과 외로움은 더욱 커졌다. 적막한 집안 분위기에 짓눌린 것처럼 가슴이 답답했고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는 듯 한 시선이 하루 종일 느껴지기도 했다.
심지어 어제는 그 시선이 너무나 생생해 온 집안을 샅샅이 뒤져보기까지 했다. 묘한 건 그럴 때 뒤를 돌아보면 영락없이 거실에 걸려있는 그림이 시야에 들어온다는 사실이었다. 이한의 말로는 증조부의 그림이라고 하는데 이상하게 현경은 보면 볼수록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다.
현경은 혼자 텅 빈 거실 소파에 앉아 그 기분 나쁜 그림을 마주하고 있었다. 시간은 이미 자정을 넘어서고 있었고 기분은 오늘따라 더욱 끔찍하게 가라앉았다.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견딜 수 있을지 점점 자신이 없어졌다.
현경은 장식장에서 양주를 꺼내 얼음을 넣은 잔에 반쯤 따랐다. 평소에도 거의 술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그런 자신의 행위조차도 낯설었다. 맙소사. 내가 이런 시간 집에서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니.
술이 뜨거운 열기를 뿜으며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려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초조함, 누군가의 시선, 막연한 불안과 우울함. 그녀는 정면에 걸려있는 그림을 향해 술잔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억눌러야만 했다. 현경은 이한에게 저 그림을 당장 떼라고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녀는 2층으로 올라갔다. 이한의 서재와 수정의 방은 2층에 나란히 마주보고 있었다. 그녀는 먼저 수정의 방문을 두드리고 문을 열었다. 수정은 여태 자지 않고 인터넷 메신저로 친구와 대화중이었다. 얼핏 보니 소희와 채팅중인 듯했다.
“소희니?”
“응.”
수정이 돌아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기분 탓인지 모르지만 이한과 함께 수정도 예전과 달라진 느낌이었다. 예전 같으면 현경에게 속마음도 털어놓고 대화도 많이 나누었을 텐데 요 며칠 통 입을 열지 않았다. 현경이 방으로 들어와 뒤에 서자 수정이 황급히 모니터를 가리며 짜증을 냈다.
“뭐하는 거야? 비밀 얘기하는 거란 말야!”
“수정아!”
“나가! 어서!”
수정이 다시 날카롭게 소리를 질렀다. 아니, 단지 소리를 지르는 정도가 아니었다. 수정은 있는 대로 눈을 치켜뜨고 무섭게 현경을 노려보았다. 현경은 너무 놀라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수정의 그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현경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방을 나왔다. 방을 나온 이후에도 놀란 심장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사춘기라지만 대체 무엇이 수정을 저렇게 예민하고 신경질적으로 만들었을까.
예전 같으면 이한에게 먼저 상의를 했겠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나눌 사람조차 없었다. 현경은 망설이다 이한의 방문 앞에 섰다. 오늘은 어떤 식으로든 대화를 나눠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문을 노크하려던 현경은 멈칫했다. 방안에서 여자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혹시 컴퓨터로 영화를 보는 건가했지만 다음 순간 여자의 소리에 대답하는 이한의 음성이 들려왔다.
“지금쯤 세상모르고 잘 테니까 걱정하지 마!”
현경은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방문을 노크하려던 손끝도 그대로 허공에 멈춰 파르르 떨려왔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거둬들이고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문에 갖다 붙였다. 다시 여자가 뭐라고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여자의 소리는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컴퓨터에서 나오는 소리는 아니었다. 여자의 말에 다시 이한이 대답했다.
“진심이야, 내가 사랑하는 건 오직 너 하나야. 결혼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Comments

제?유니래..
괜찮은 재미가 있는듯 한대... 음~ 텍스트로 떠서 핸폰에 담아 이북으로 개차~(?)봐야게꾼여~ ^^ 
shaRp guY
겨우다봤다...........emoticon_113 
윈드써핑
긍데 사진은... 좀 올리지 말아봐
이런사진..ㅡㅡ;;; 
니와토리
잘 읽었습니다~
시간 잘 가네요! ㅋ 
★쑤바™★
오....짐까지 올린걸....다 합친거?ㅋㅋ

후훗....이따 퇴근하고 봐야지..
지금은 크윽....OTL 
아프리카
재미있었습니다~ 
명랑!
헐... 이런걸 '스압'이라고 하는거구나~~! ^^
이걸 읽느니 다운받아 보겠다... ===333333333 ㅋㅋㅋ 
KENWOOD
쌍커플 잘됐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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